넘어가기 메뉴



한반도 남녘 작은 도시에 남은 고귀한 흔적들

  • 페이스북
  • 트위터
  • 프린터

장소를 초월해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생의 모든 순간은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 수줍은 첫 키스도, 가슴 아픈 헤어짐도, 우리는 장소를 통해 추억을 회상한다. 말과 몸짓은 시간에 지워지지만, 필름처럼 남은 장소는 우리를 그때로 데려간다. 우리 대학 출판부가 허정도 건축가의 ‘도시의 얼굴들’을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 대학 출판부가 기획한 ‘지앤유 로컬북스’의 네 번째 책으로 2019 고창한국지역도서전 조직위원회가 선정한 제3회 한국지역출판대상 천인독자상 대상에 뽑혔다. ‘도시의 얼굴들’은 도시와 건축에 관한 책이 아니다. 한 도시를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들이 머물고 스쳤던 시간과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출판부는 책 출간을 기념해 지난 5월 2일 ‘북카페 지앤유’에서 ‘음악과 이야기가 있는 북콘서트’를 개최했다. 허정도 건축가가 들려주는 세 도시 이야기를 들어 보자.


|‘도시의 얼굴들’ 북콘서트에 가다

도시재생을 위한 한 줌의  거름이 될 책


저자 허정도 건축가는 마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건축가 이희태의 영향을 받았고, 도시 공간 변천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국토지주택공사 상임감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지역출판대상 천인독자상 심사위원장 고재종 시인은 ‘도시의 얼굴들’을 이렇게 평했다. “격론 끝에 최종적으로 선정된 ‘도시의 얼굴들’은 마산이라는 도시를 거쳐 간 왕, 문학인, 정치가, 운동가, 성직자 등의 행적으로 삶의 장소성과 도시재생의 스토리텔링 가능성을 담담하게 풀어낸 건축가의 도시 이야기이다. 특히 이 작품은 자료 조사의 충실성을 확보한 유려한 글쓰기로 우리에게 서정적 도시 기행을 가능케 하는 데 있어 지역적 특성, 기획력, 대중성을 갖춘 수작이어서 대상으로 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최근 도시 정책의 무게 중심이 도시재생에 있다. 도시재생은 문화에 방점이 있고, 문화적 도시재생은 스토리텔링이 핵심이다. 허 작가는 이 책이 문화적 도시재생을 위한 한 줌의 거름이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도시재생에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말이 오갈 때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발굴하고 엮어 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어느 날, 경상대 김종길 선생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마산 도시를 주제로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오랜 생각은 책으로 탄생했다. 이 책이 아름다운 이야깃거리로 오래 남는 스토리텔링이 되면 좋겠다. 행복은 기억으로 숙성되니 말이다.”


“나를 잊지 마세요”


‘도시의 얼굴들’은 20세기 전반인 1960여 년, 마산이라는 한 도시에 남겨진 16인의 흔적을 추적한 책이다. 널리 알려진 이도 있지만 마산에서만 활동한 탓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도 있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해서 그분들 삶의 무게가 결코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책에 등장하는 16인은 옥기환과 명도석, 김해랑 등 평생 마산에서 살다간 이도 있지만 여장군 김명시(金命時)처럼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거친 대륙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도 있다. 시인 백석처럼 스치듯 지나간 이도 있고 순종, 이극로, 김수환처럼 계획된 일 때문에 머문 이도 있다. 이원수, 김춘수, 천상병은 문학의 터를 마산에서 닦았고 나도향, 임화, 지하련, 그리고 이름 모르는 산장의 여인은 병 때문에 마산과 인연을 맺었다. 열일곱 살 김주열은 마지막 엿새를 이 도시에서 보냈다.

지면에는 이토록 귀중한 역사의 열여섯 인물 중에서도 허 작가가 ‘음악과 이야기가 있는 북콘서트’를 통해 직접 소개한 ‘여장군 김명시’에 대해서만 짧게 전한다. ‘여장군’이라 불렸던 김명시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러시아를 거쳐 중국 대륙과 만주 벌판을 떠돌며 민족 해방을 위해 싸웠던 그의 여정은 멀고 험했다. 그는 1907년 마산 동성리 189번지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오늘, 이 도시에 남아 있는 김명시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생가 터마저 최근 조성한 문화광장에 편입되어 이제는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김명시의 생애를 탐구한 워싱턴대 남화숙 교수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치열하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민족을 위한 형극의 길을 걸은 여성이다. 주의나 노선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그녀의 치열한 투쟁 정신과 민족애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민족 해방 운동사에서 이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지만, 그녀는 잊혀졌다. 그녀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해방된 조국이 만든 이념의 올무가 김명시를 역사에서 지워 없앴다.

세월 속에 묻혀간 삶들이 묻은 창동의 250년 골목길. 그 높고 낮은 지붕 위에 소녀 김명시의 재잘대는 소리도 묻어 있을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귀를 열면 나지막한 그녀의 음성이 들린다. “나를 잊지 마세요.”


‘도시의 얼굴들’ <진주 편>이
나온다면?


이날 ‘음악과 이야기가 있는 북콘서트’에서는 ‘마산’, ‘통영’, ‘진주’, 세 도시의 이야기가 진행됐다. 허 작가와 함께 통영인뉴스 김상현 기자, 권영란 칼럼니스트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세 사람은 입을 모아 경남이 지닌 가치를 역설했다.

권 칼럼니스트는 “‘도시의 얼굴들’은 크로스체크(정보를 대조·검토한다는 문학 용어)가 매우 잘 된 글이다. 처음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자는 이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도시의 얼굴들‘ <진주 편>이 나온다면 어떤 인물을 이야기해야 할까?’였다. 여러분은 누가 떠오르시는가?”라고 말했다. 관객들은 말이 없었다. 그는 “진주에는 근현대사가 사라지다시피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처럼 진주에 근현대사 역사가 사라진 까닭을 ‘기득권층의 태만’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지역민이 우리 도시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것이 중요하다. 형평운동을 주도한 강상호 선생, 계천예술제를 창시한 설창수 선생 등 ‘도시의 얼굴들’ <진주 편>이 나온다면 꼭 담아내고 싶다.” 권 칼럼니스트가 언급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지역 출판, 특히 우리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책이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아스라한 장소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서정적 도시 기행. 시간을 거슬러 16인의 행적을 따라 걷다보면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있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근대의 역사를 찬찬히 걷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음악과 이야기가 있는 북콘서트’에서는 ‘마산’, ‘통영’, ‘진주’, 세 도시를 이야기가 진행됐다. 허 작가와 함께 통영인뉴스 김상현 기자, 권영란 칼럼니스트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 취재 사진 강소미 기자
  • - Copyrights ⓒ 경상대학교 신문방송사 -

목록

사이트 안내 및 정책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보공개
  • 네티즌윤리강령
  • 이메일집단수집거부
  • 교직원검색
  • 규정집
  • 교직원행동강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