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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진주 지역 애국지사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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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진지 어느덧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올해 삼일절은 ‘100’이라는 숫자와 함께 독립운동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특집 기획으로 3·1운동 당시 진주의 역사를 경상대신문에 담았다. 지역의 애국지사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역사, 그 100년을 되돌아본다. 조선의 국어학자로 우리말 연구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주시경 선생은 “땅은 독립의 터전이요, 사람은 독립의 몸이요. 말은 독립의 본성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독립의 본성인 우리말에 아직까지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제의 잔재에 대해 알아보자.


성공적인 독립운동으로 거듭난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누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그 앞의 시민 5천 명이 듣고 다음 날 삽시간에 독립선언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 전국적으로 펼쳐진 3·1운동의 시작이었으며 남녀노소, 학생 등 신분, 성별에 상관없이 참여하는 등 다양한 계층이 운동에 일조했다.

3·1문화재단이 발행한 ‘3·1운동 새로 읽기’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일제에 의해 폭압적인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국제 사회에 독립을 청원하려 했으나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 진영에 가담했던 일본이 승전국이 되어 국제적 입지가 강화돼 청원에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 정세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확산되어 도쿄 유학생들이 2·8독립 선언을 하는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이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이에 자극받은 국내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이 3·1운동을 일으킨다.

이렇게 일어난 3·1운동은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7곳에서 독립 선언식을 알리고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그날 참석했던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부산, 창녕, 동래, 함안, 의령, 진주 등 경남 지역으로 내려와 알림으로써 지역 독립운동에서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바뀌었다. 일제가 총칼로 대응했음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2천여 회 일어났으며, 2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애국지사들은 훗달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위한 초석을 마련한다.

우리 대학 김중섭(사회학과) 교수는 “3·1운동 이후 임금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국민이 주인인 민주 공화정을 표방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는 큰 의미가 있어 3·1운동은 성공적인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화 선생의 자택이 있었던 진주시 하촌동 하촌마을의 앞에 세워진 기념비. 이곳에서 3
·1운동을 위해 비밀 회합을 가졌다.

진주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다

1919년 2월 8일 적의 심장부에서 외친 2·8독립선언과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있은 후 3월 10일 새벽 진주 시내 곳곳에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격문이 나붙는다. 점차 끓어오르던 독립의 열기 속에서, 애국청년 김재화, 심두섭, 조웅래, 박대업 등이 ‘진주 3·1운동’을 일으킨다. 이들이 고종의 장례식 참여를 위해 서울로 향하다 목격한 것은 바로 3·1만세운동이었다. 전국으로 항일 시위와 투쟁이 퍼져야 한다고 각성한 이들은 진주로 돌아온 즉시 김재화 선생의 자택에서 권채근, 강달영, 정용길 등과 비밀 회합을 가져 대대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다. 또한 서울에서 가져온 격문과 새롭게 작성한 ‘교유문(敎諭文)’,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군중들에게 비밀리에 배포했다.

진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일제 헌병들의 경계가 삼엄해지자, 주동 청년들은 3월 18일 장날, 정오에 교회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일제히 5곳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한다. 마침내 3월 18일 12시, 만세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진주 3·1운동에 가담한 한규상 선생은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교회’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기미년 3월 18일은 유달리 아침부터 폭풍전야의 정적과 긴장감으로 얽힌 분위기였다. ···(중략) 행동 개시의 정오가 되자 봉래동 예수교회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분배 소지케 하고 시가지 가로를 시위 행진하여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고창하니 삽시간에 5구역 시민들이 벌 떼같이 모여들어 온 시중은 만세꾼이 홍수같이 창일하여 만세를 호창하니 산천이 진동하였다.”


지난 2012년 진주교회가 복원한 종탑과 종의 모습. 종의 원본은 충남 천안시에 위치한 고려신학대학원 역사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조선독립만세라고 적힌 기와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 대열 5대는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일제는 헌병만으로 이를 제지할 수 없게 되자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 군중을 난타하였다. 일제의 폭력 저지에도 불구하고 경남도청(현 영남포정사) 앞에 모인 군중은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저녁 무렵,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 작업이 시작됐고 약 3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진주 지역 3·1운동 총지휘자였던 김재화 또한 헌병에 붙잡혀 대구 감옥에 수감된다. “잘못하면 죽게 될 것이다. 시위의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교도관의 회유에도, 김재화 선생은 되려 옥중에서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기생과 걸인, 모든 계층이 참여한 진주의 민족 정신

3·1운동 당시 진주의 걸인과 기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은 ‘진주시사’와 ‘내 고장의 전통’에 기록되어 있고, 고은 시인의 시집 ‘만인보’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알려졌다.

1919년 3월 18일, 진주의 걸인 100여 명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리를 누볐다. 다음 날 오전에는 한금화를 비롯, 논개의 기백을 계승해 오던 기생들이 남강변을 돌아 촉석루를 향하여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25일자 매일신보에는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진주 기생들의 만세의거를 확인할 수 있다. 경찰이 국향, 금연 등 기생 주모자 6명을 붙잡아 구금하자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천대받는 신분이었던 걸인과 기생을 포함해 학생, 지식인, 상인, 노동 독립단, 종교인 등 전 시민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참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중섭 교수는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진주의 민족적 정신을 잘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진주성 내에 위치한 3·1독립운동 기념비. 진주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1971년 3월 1일 진주 시민들이 결의하여 건립하였다.

진주성에 있는 ‘3·1독립운동 기념비’

진주 도심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문산, 반성, 정촌 등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그해 5월까지 3만 명이 진주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서울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중이 결집한 것이다. 차별 없이 모두가 하나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외쳤던 진주 만세운동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으로 파생돼 우리나라 전체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기도 했다.


푸른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끼고, 장엄하게 솟아 있는 진주성. 이곳에 진주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시민들은 뜻을 모아 ‘3·1독립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두 눈 감고 가슴에 손 얹으면 땅을 흔들던 고함소리 귓전에 다시 새로와라. 반만 해를 맥맥히 이어 슬기로 다듬고 죽음으로 지켜온 내 조국. ···(중략) 갸룩한 애국충혼을 가슴 모아 우러르며 여기 돌 다듬어 비를 세우노니 길이길이 겨레의 앞길에 찬란한 빛이 되리라.” 

  • 취재 손석호 반경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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